“나는 왜 돈을 내고 아침마다 지옥(철)을 경험하고 있는 걸까?”
어느 여름날 아침 8시 47분, 지하철 2호선에서 내리며 스스로를 구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매일 같이 밀치고 밀리는 이 지하 생활을 청산하고 지상으로 나가기로!
[탈출지도]
무엇으로 나를 구원할까?
지하철로 정거장 5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 애매한 거리를 이동할 수단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우선 버스, 한번 환승해야 하는 이 루트는 정류장에서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하게 발을 구를 모습이 훤해서 패스. 평소 로망이었던 오토바이는 꿈꾸던 모델이 경차보다 조금 비싸더라구요… ‘길어야
15분 거리인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어 패스. 요즘 거리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전동 킥보드. 꽤 괜찮은 후보지만
아침부터 앱을 켜고 근처에 공유 킥보드가 남아 있는지 뛰어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전시에서 본 ‘자전거를 탄 폴 스미스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제가 원한 건 단순한 지옥철 탈출이 아니라 조금 더 여유롭고 건강한 아침임을요! 바람에 백발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던 폴 스미스 경의 여유롭고 유쾌한 그 모습이 어느새 제 마음에 들어와 있었나
봅니다.
좋았어 자전거다!
취미로 자전거를
타는 친구들에게 어떤 자전거가 좋을지 물었습니다. ‘운동의 시작은 장비이며 끝도 장비’라고 믿는, 저를 아는 친구들은 300만
원이 넘는 자전거와 이태리제 라이딩 슈트를 추천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자전거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깊고 광활했습니다. 최적의 구동계와 프레임, 휠 셋 조합을
찾기 위해 검색하고 또 검색했습니다. 정보를 알아볼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죠. 문득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다 바다의 깊이에 놀라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잊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투르 드 프랑스*’ 참가를 위한 자전거를 사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저 출퇴근용 자전거가 필요했던 것이었죠. ‘출퇴근용’으로 자전거의 용도를 명확히 하니 가격대가 정해지고, 이태리제 라이딩
슈트도 필요 없어졌습니다.
*Le Tour de France, 매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일주
사이클 대회
출퇴근용 자전거 사기
어떤 자전거를 살지도 중요하지만 의외로 “어디서” 사는지도 중요했습니다. 자전거도 옷처럼 신체에 맞게 조정하고, 자동차처럼 주기적으로 점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구동계, 프레임, 휠” 대신 “자전거 가게”를
검색하기 시작했어요. 회사 근처에 위치하여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자전거 가게를 찾을 수 있었는데요, 블로그에 자전거 판매 외에도 유지와 보수에 관한 글도 자주 올라와 왠지 더 믿음이 갔습니다. 자전거 가게에 들어서자 멋진 형태와 컬러의 자전거들이 다시 제 눈과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일단 사고, 투르 드 프랑스 나가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애써 프랑스로 달려가려는 마음을 붙잡고, 사장님께 출퇴근용 자전거 추천을 부탁드렸습니다. 추천받은 자전거로
구매를 결정을 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시트와 핸들바의 높이 등을 조정 받았어요. 사장님은 조정하는 중간중간 자전거 출퇴근 시 알아 두면 좋은 정보를 공유해주었습니다. 가령 발의 어느 부분을 페달 중앙에 놓아야 힘이 효율적으로 전달되는지, 어떻게
정차한 버스를 안전하게 앞질러 가는지와 같은 운행에 필요한 실질적인 정보였죠. 가게를 나서며 “자전거는 세워만 둬도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니 안전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들러 점검받는 게 좋아요. 언제든 부담 가지지 말고 들러요.”라는 사장님의 말을 들으니 ‘자전거’ 대신 ‘자전거
가게’를 검색한 건 잘 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기분
좋고 안전한 출근길을 위한 좋은 파트너를 만났으니까요.
스스로 구원한 폴 셉셔너
자전거로 지옥 탈출에 성공하였고, 좋은 파트너를 만나 자전거를 잘 관리하며 매일 즐겁게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강제로 밀당 하게 되는 갇힌 공간에서 벗어나 페달을 밟은 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감과 가속에서 오는 긴장감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풍경이 멋지면 잠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뺨을 스치는 바람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여유도 생겼지요. 아직 자전거 운전이 어설퍼서 가끔 휘청거릴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사진 속 폴 스미스 경처럼 여유롭게 운전하며 건강하게 웃을 수 있겠지’ 라 생각하며 폴 셉셔너는 오늘도 열심히 페달을 밟습니다 ;-)
[출근길 9/30]
[퇴근길 8/20]
[퇴근길 9/16]
[퇴근길 9/23]
editor GRB
잘샀네 못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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